을사조약 이후 조선을 합병하는데 5년이나 걸린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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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곧바로 조선을 협박해서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았고 속국으로 만든 이후에도
조선을 곧바로 합병해서 일본의 영토로 만들지 않고 서서히 조선의 국권을 하나하나 박탈하다가 1910년이 되어서야 조선을 합병시켜 을사조약 이후 조선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무려 5년이나 걸렸다.
이는 사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곧바로 조선을 병합시킬려고 해도 그렇게 할수있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은 그야말로 일본에게 있어서 모든 국력을 다 긁어모았던 총력전으로 일본이 이기긴 했지만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자국 1년 예산에 6배에 달하는 돈을 전쟁비용으로 사용했고 전쟁 사망자만 8만명에 달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거의 대부분의 국력을 소진해서 지쳐있는 상황이여서 일본입장에서도 곧바로 조선을 병합시킬려고 했다가 조선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면 일본 입장에서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안그래도 러시아와의 총력전으로 지쳐있는 상태에서 또다시 전쟁을 벌이는건 일본 입장에서도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당시 포츠머츠 조약으로 러시아로부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긴 했지만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병합시키는 것에는 반대하였기 때문에 당시 일본은 어느정도 러시아의 눈치까지 살펴야했고 언제 러시아가 보복전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였다.
실제로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패배에 대해서 일본에 대한 보복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일본이 그런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건 가면 갈수록 러시아의 예상을 뛰어넘는 러시아내 혁명시위들로 인해 러시아의 정책방향이 일본과 화친을 맺고 자국내 문제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일본과 러시아가 1907년도에 체결한 러일협약 이후부터다.
1907년도 일본은 러시아가 외몽골을 차지하는걸 묵인해주는 대가로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걸
묵인해주는 러일협약을 맺으면서 일본은 그때서야 러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또 거기다가 조선내 의병들의 막대한 저항도 한몫했다.
1907년 정미조약으로 조선의 군대가 해산되면서 해산된 조선의 군인들도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들의 전력이 강화되어서 조선내
의병들이 각지에서 활개치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할려면 먼저 그러한 의병들부터 확실히 토벌해서 뿌리를 뽑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1907년 12월~ 1909년 6월 각 도별 전투 의병 수
각도(순위별) |
1907.12- 1908.12 |
각도(순위)별 |
1909. 2- 1909. 6 |
강원 전남 전북 황해 충남 충북 함남 경북 경남 평북 경기 평남 함북 |
18,599(22.5) 10,544(12.7) 9,960(12.0) 7,998(9.7) 7,666(9.2) 6,815(8.0) 6,438(7.8) 5,702(6.9) 3,328(4.0) 2,590(3.1) 1,453(1.8) 1,391(1.7) 283(0.3) |
전남 전북 경기 경북 충남 강원 황해 충북 경남 평남 평북 함남 함북 |
17,579(45.6) 5,576(14.5) 3,667(9.5) 3.453(9.0) 2,468(6.4) 2,148(5.5) 1,003(2.5) 934(2.4) 832(2.2) 540(1.4) 270(0.7) 123(0.3) - |
합계 |
82,767(100) |
합계 |
1,976(100) |
의병들이 가장 많이 활개쳤던 1907년도에 조선 각 도의 의병들이 무려 8만이 넘었다.
일본은 자국내 군대를 투입시켜서 1907년도부터 의병들을 본격적으로 토벌해서 뿌리뽑기 시작했고 남한대토벌 직전에 의병들의
숫자는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전라도내 의병들은 활개를 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병합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전라도내 의병들을 완전히 소탕해서 뿌리를 뽑아야 했고 남한대토벌 작전(일명 호남대토벌 작전)으로 1909년 9월에서 10월달에 걸쳐 2달동안 호남의 의병들을 거의 대부분 토벌해서 뿌리를 뽑는데 성공한다. 일본은 1909년 9월 1부터 2260명의 병력을 호남 지방에 투입하고 현지의 경찰력까지 총동원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해안선에서 육지에서 쫓겨 오는 의병들을 토벌하기 위해 수뇌정대를 출동시켜 해안선을 봉쇄하고 명부에 의해 거주하는 20세에서 60세의 남자들을 모두 조사하고 가옥을 뒤지며 의병을 숨겨주고 식량을 제공했는 가옥이 한곳이라도 발견되면 해당 마을 전체를 불지르고 학살하고 초토화시키며 또한 한번 수색한 마을을 불시에 다시 수색해서 일본군의 단속을 피해 숨었다가 안심하고 다시 나타난 의병들을 사살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당시 일본 스스로도 호남대토벌작전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쾌거로서 그 규모가 엄청나 마치 대전쟁과 같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러한 대대적인 토벌로 호남지역의 의병들을 토벌해 뿌리를 뽑는데 성공한 일본군은 이후에는 1909년도말까지 경기도 , 경상도의 있는 의병들마저 소탕을 끝마치고 사실상 1910년도 초가 되어서야 조선내 의병들을 거의 대부분 토벌해서 뿌리를 뽑아서 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할수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측 기록에 의해서도 실제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기 직전까지 사살했는 의병들의 숫자가 17,968명에 달하고 1994명을 체포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즉 일본이 을사조약 이후 1909년도 말까지 러시아의 위협과 조선내 각지에서 활개치는 의병들 때문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는 상태였고 일본이 조선내 의병들을 거의 대부분 소탕해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던건 1910년도 초부터로 그후 일본은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1910년도 중반에 조선을 병합시켜 일본제국의 영토로 편입시킨다.
사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제대로 장악했던 것은 1910년도 초부터기 때문에 일본이 1910년도 8월에 조선을 병합시킨건 좀 뜸을 들이다가 조선을 병합시킨게 아닌 사실상 조선을 병합시킬수 있는 상황이 되자마자 몇달만에 곧바로 병합을 시킨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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